유럽 여행

[이탈리아] 역사와 종교가 살아 숨쉬는 도시, 로마 - 바티칸 시국

늘푸르른나 2011. 8. 30. 08:00

지구 상에서 가장 작은 국가인 바티칸 시국은 불과 0.44㎢의 면적에 950명의 인구(대부분이 성직자임)로 이루어져 있다. 교황에 의해 통치되는 이 작은 국가는 세계에서 가장 큰 바티칸 박물관과 산 피에트로 사원(일명, 성 베드로 성당)을 보유하고 있으며 매해 수백만 명의 관광객이 찾는 관광 명소이기도 하다. 다빈치 코드로 유명한 댄 브라운의 또 다른 화제작인 '천사와 악마'의 주 무대로 등장하기도 했던 바티칸은 그 책 속의 생생한 묘사로 인해 언젠가 꼭 한번 가 보고 싶은 곳으로 내 가슴의 한편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그렇기 때문에 로마에 입성하는 순간부터 나의 마음은 기대감과 설레임으로 한껏 고무되어 있었다.

 

바티칸 투어는 4박 5일간의 로마 일정 중에서도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투어 날짜를 정하는 것에서부터 신중을 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워낙에 바티칸 박물관을 찾는 사람들이 많은 것으로 소문이 자자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사람이 좀 적을 것으로 예상되는 월요일을 D-day로 잡았다. 42일간의 유럽 여행 일정 동안 모든 것은 자유 일정이었던 반면에 유독 바티칸 투어만은 유로 자전거 나라에서 진행하는 가이드 투어를 이용하기로 결정했는데, 그것은 바로 모든 바티칸 투어 관련 책자나 인터넷 자료에서 반드시 가이드 투어를 받는 것이 좋다는 강력한 권고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수박 겉핥기 식이 아닌 제대로 둘러보고자 하는 개인적인 욕구가 강했기 때문이었다.

 

바티칸 투어 예약은 3일 전에 로마 현지에서 인터넷을 통해 했다. 예약을 할 때 재미있는 것이 온라인으로 비용을 입금하면 32,000원인데 투어 당일에 직접 지불시에는 30유로(약 48,000원)를 지불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예약만 하고 실제로 나타나지 않는 문제 때문에 그런 비용 차이를 두었을 거라고 어느 정도 이해는 됐지만 거의 50%나 비싼 가격을 책정한 것은 좀 심하다 싶었다. 이번 유럽 여행길에 여러모로 유용했던 아이폰이 이때도 그 힘을 발휘했다. 간단하게 인터넷 뱅킹 어플로 32,000원을 온라인 입금하고 바티칸 투어 예약을 마칠 수 있었다.

 

바티칸 투어 당일, 새벽같이 일어나서 준비하고 모이는 장소인 지하철 치프로(Cipro-Musei Vaticani) 역으로 이동했다. 치프로 역에 도착했을 때 시간이 7시 50분이었는데 정말 많은 사람들이 나와 있었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20명 정도씩 두 팀으로 나누어야 했는데 바티칸 투어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었다. 팀이 분리되고 곧바로 바티칸 박물관으로 이동하여 8시에 바티칸 박물관 입구에 도착했다. 그런데 벌써 바티칸 박물관 입구는 담벼락을 따라서 긴 줄이 늘어서 있었는데 사진에서 많이 봤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바티칸 박물관 입구의 모습. 이 입구를 통해 들어가기 까지 30분 이상을 기다려야 했다. 바티칸 박물관 입장료는 15유로였는데 가이드 투어와 관계없이 각자 구입해서 입장해야 했다.  

 

회화관(Pinacoteca) 근처의 홀에 모여 앉아 가이드로부터 약 40여 분간 중세 시대부터 르네상스 시대까지의 종교화의 변천사와 르네상스 3대 거장 중 한 명인 라파엘로에 대해서 자세한 설명을 들었다. 오전에 둘러볼 회화관의 주요 작품들을 이해하기 위한 일종의 선행 학습이었는데 장소가 장소였던 만큼 귀에 쏙쏙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회화관(Pinacoteca) 입구의 모습. 비잔틴 시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이탈리아 종교화를 모아 연대별로 전시해 놓은 곳으로 이곳에서 종교화의 변천사를 한눈에 살펴 볼 수 있다. 

 

회화관에서 만나는 주요 작품들. 

 

 

종교화들 사이에서 눈에 띄는 그림 하나. 아기 천사들이 기도하는 모습을 담고 있는 프레스코화로 마음을 안정시키는 효과가 있어서 심리 치료에 사용되기도 하는 그림이라고 한다.  

 

 

 

르네상스의 3대 거장 중 하나인 라파엘로의 '그리스도의 변용'. 라파엘로의 마지막 작품으로 열병을 앓던 라파엘로가 상부만 그린 채 1520년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그의 제자인 줄리노 로마노가 라파엘로의 밑그림을 바탕으로 나머지 부분을 완성한 것이라고 한다. 라파엘로의 작품을 보면 그 색감이 다른 작가의 작품들과는 두드러지게 차별화됨을 느낄 수 있는데 한마디로 표현하면 '고급스러운 선명함'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르네상스 3대 거장 중 맏형격인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성 제롬(Saint Jerome). 바티칸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유일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으로 1480년경의 작품으로 추정되며 밑그림 상태의 미완인 채로 남겨졌다. 역사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작품이라고 하는데 미적 감각을 중시하는 나에게 그리 큰 감흥을 주지 못하는 작품이었다.

 

 

바로크 미술의 대가인 카라바조(Caravaggio)의 데포지션(Deposition). 

 

회화관을 둘러보는 데에는 2시간 정도가 소요되었다. 회화관을 나와서 점심을 먹기 전에 회화관 앞의 홀에 자리잡고 앉아 1시간 30분 남짓 미켈란젤로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들었다. 특히, 바티칸 투어의 백미라 할 수 있는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화의 제작 과정과 작품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들었는데 오후에 보게 될 천장화에 대한 기대감이 더욱 고양됨을 느낄 수 있었다. 

 

바티칸 박물관 내부에 위치한 카페테리아에서 점심으로 조각 피자와 콜라 한 잔을 사 먹었다. 약간은 비싼 감이 없지 않은 6.1유로의 가격이었는데 맛은 그저 그랬다. 가이드가 말하길 바티칸 박물관에서 판매되는 음식 맛은 그날 그날 주방장(거의 종신직으로 음식 맛이 없어도 절대 짤릴 염려가 없는 철밥통이라고 한다)의 컨디션에 따라서 심한 편차를 보인다고 했는데 아마도 오늘은 컨디션이 별로였던 듯했다. 

 

솔방울 정원의 전경. 점심 식사후 조각 작품들을 감상하기 위해 이동하는 중 지나게 된 정원으로 정원 중앙의 지구본 모양의 조형물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이 조형물은 '지구 안의 지구'라는 작품으로 오염되고 있는 지구를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이 정원을 왜 솔방울 정원이라고 부르는지를 보여 주는 대형 청동 솔방울의 모습.

 

고대 조각관 내부의 모습. 긴 통로를 따라 정말 많은 조각상들이 늘어서 있었는데 이것들 모두는 그냥 입가심에 불과하여 그냥 스치듯이 지나쳤다. 

 

고대 조각관 건물 중앙에 자리잡은 팔각 정원의 모습. 팔각형 형태의 모양 때문에 팔각 정원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으며 이곳에서 바티칸이 자랑하는 3대 고대 조각상 중에 2개를 만나 볼 수 있다. 

 

3대 고대 조각상 중에 첫 번째인 벨베데레의 아폴로. 기원전 4세기의 그리스 시대에 제작된 아폴로 상으로 조각가 레오카레스의 청동 원작을 대리석으로 모각한 것이라고 한다. 교황 율리우스 2세에 의해 현재의 위치인 벨베데레의 안뜰(일명, 팔각 정원)로 옮겨져 '벨베데레의 아폴로'란 이름을 얻게 되었다.  

 

 

 

3대 고대 조각상 중의 두 번째인 라오콘(Laocoon). 라오콘은 트로이 전쟁 때 그리스 군의 목마를 토로이 성 안에 끌어들이는 것에 반대하다 신의 노여움을 사서 두 자식과 함께 뱀에게 죽임을 당한 트로이의 마지막 신관으로 두 아들과 함께 뱀에게 휘감긴 채 필사의 저항을 하고 있는 라오콘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기원전 2세기 경 로마 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되며 1506년 로마 에스퀼리노 언덕의 포도밭에서 한 농부에 의해 발견되었다. 천재 조각가 미켈란젤로가 이 작품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한걸음에 달려가기도 했다는데 이 조각 작품을 보고는 감탄을 금하지 못했다고 한다.  

 

 

 

라오콘은 1506년 발견 당시 라오콘의 오른 팔과 두 아들의 오른팔이 잘려진 상태에서 발견되었다. 이를 각 인물들의 자세를 고려하여 아래의 사진에 있는 것처럼 팔을 복원(오른팔을 쭉 뻗은 모습으로)해 놓았었는데 1900년 대에 들어와 라오쿤의 잘려진 오른팔(굽어 있는 모습의)이 추가로 발견되면서 복원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게 되었다. 그래서 잘못 복원된 모든 팔들을 제거하고 발견된 라오콘의 오른팔만을 조각상에 붙여 놓은 지금의 모습으로 돌아가게 되었다고 하는데, 함부로 예단한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알려 주는 좋은 사례가 아닐 수 없다.   

 

바티칸 박물관이 자랑하는 3대 고대 조각상 중 마지막인 벨베데레의 토르소(Torso). 기원전 1세기경 작품으로 159cm나 되는 그 거대한 크기로 인해 사자 가죽 위에 앉아 있는 헤라클레스를 표현한 것으로 추정되었으나 근래에 들어서는 다른 영웅인 필로크테테스(Philoktetes)라는 설이 유력하게 받아 들여지고 있다. 이 조각상의 나머지 부분을 완성해 달라는 교황의 요청에 미켈란젤로가 '이것 자체로 완벽하다'며 거절한 것으로 유명한 작품이며 미술사에서는 토르소라는 형태의 미술 작품의 시초가 되는 작품이기도 하다. 원래는 다른 2개의 3대 고대 조각상들처럼 팔각 정원(벨베데레의 안뜰)에 놓여 있었으나 보다 많은 관람객들이 좀더 편하게 관람할 수 있도록 지금의 뮤즈의 방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네로 황제의 욕조. 고급스럽고 보기에 좋은 것까지는 좋은데 욕조에 오르내릴 때 좀 힘들지 않았을까 싶었다. 

 

너무나 많은 작품들이 넘쳐나니 웬만한 작품에는 눈길조차 가지 않더라는... 

 

다산을 상징하는 풍요의 여신. 아무리 다산의 상징이라지만 여인의 가슴을 무슨 바나나가 주렁주렁 달려 있는 것처럼 표현한 것이 좀 재미있었다. 

 

바닥을 장식하고 있는 청금석. 옛날에는 이 청금석이 굉장히 귀한 것으로 여겨졌다고 한다.  

 

로마 시대 때밀이 소년의 상. 흑인 노예 소년의 오른 손에 들려 있는 때밀이 수건(그야말로 이태리 타올이다)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양탄자. 얼핏 보면 그림 같지만 이게 수를 놓은 양탄자라는 사실이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착시의 방. 착시 효과를 이용하여 그림이 입체적으로 보이도록 해 놓은 곳이다. 

 

 

 

 

지도의 방. 화려한 황금빛 천장으로 인해 양쪽 벽면에 늘어서 있는 지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옛날에 만들어진 베네치아(베니스)의 지도. 베네치아를 들러서 이곳에 왔기 때문인지 더욱 내 눈길을 사로잡았는데 현재의 모습과도 거의 일치하는 정확함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건물들로 둘러쌓인 바티칸 시국의 모습. 이렇게 보니 정말 바티칸 시국이 얼마나 작은 나라인지가 실감이 갔다. 재미있는 것은 몇 대 안되는 소방차의 모습이었는데 바티칸 소방대가 창설된 이래로 단 한 차례도 출동한 적이 없다고 한다. 일반적으로는 격무에 시달리는 소방대원이 이곳에서는 한 마디로 천혜의 보직이라고 할만 하다.

 

교황의 집무실로 사용되었던 4개의 방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라파엘로의 작품들. 라파엘로가 25세 때부터 37세에 명을 달리할 때까지 완성한 프레스코화들로 그 중에서도 '아테네 학당'이 최고의 작품으로 손꼽힌다. 그려진지 500년이 지난 작품들임에도 불구하고 그 선명함이 방금 물감을 칠한 것처럼 뛰어났는데 최근에 이루어진 복원 작업을 통해서 이렇게 선명한 색감을 회복할 수 있었다고 한다. 

 

 

 

 

 

라파엘로의 대표작인 아테네 학당. 브라만테가 설계한 템피에토와 비슷하게 생긴 학당에서 신학, 철학, 법학, 예술 등 학문의 네 영역을 대표하는 54명의 고대 신학자와 과학자가 한가로이 노닐며 담화를 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그림 중앙의 왼쪽편에 붉은색 망토를 두르고 하늘을 향해 오른 손을 들고 있는 철학자가 바로 이데아론의 주창자인 플라톤으로 라파엘로가 존경한 스승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얼굴을 하고 있다. 한편, 플라톤의 오른편에 푸른색 망토를 두르고 오른 손을 앞으로 내밀고 있는 철학자는 현실 세계를 중시한 아리스토텔레스로 라파엘로의 라이벌이었던 미켈란젤로의 얼굴을 하고 있다. 라파엘로는 라이벌 관계였던 미켈란젤로를 탐탁치 않게 생각하다가 미켈란젤로가 그린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화를 보고는 존경심을 갖게 되었다고 하는데 그 존경심을 표현하는 의미로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델로 미켈란젤로를 삼았다고 한다.

 

 

 

라파엘로의 방(옛 교황 집무실)을 지나서 바티칸 박물관의 하이라이트인 시스티나 예배당으로 향했다. 시스티나 예배당에 들어서기 전에 가이드로부터 절대 사진 촬영은 안 된다는 주의를 들었는데 '사진 촬영을 물리적으로 막을 수는 없다. 하지만 그런 잘못된 행동으로 인해 이 역사적인 유산의 보호를 위해 일반에 대한 공개가 막히게 될 수 있다'라는 가이드의 말이 참 가슴에 깊이 와 닿았다.

 

드디어 고대하던 시스티나 예배당(Cappella Sistina)에 들어섰는데 처음에는 약간은 어두운 듯한 느낌이 조금은 낯설게 느껴졌다. 자세히 보니 별도의 조명을 하지 않고 예배당의 작은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자연광만을 사용하여 실내가 밝혀지고 있었는데 이 역사적인 유산의 회손을 막기 위한 필사의 노력을 보는 듯했다. 눈을 들어 천장을 올려다보니 그곳엔 바로 미켈란젤로의 천장화가 펼쳐져 있었다.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화는 1508년에 그리기 시작하여 4년이 경과한 1511년에 완성되었다. 조각가로서의 자부심이 너무나 강했던 미켈란젤로였지만 교황의 명령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 천장화를 그려야만 했는데

그 배후에는 조각가로서 교황에게 인정받고 승승장구하던 미켈란젤로를 시기하던 유명한 조각가이자 건축가였던 브라만테의 음모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 음모는 보기 좋게 실패로 돌아가 버렸고 아이러니컬하게도 미켈란젤로를 더욱 거장으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이 작품은 '빛과 어둠의 분리'에서 '술에 취한 노아'에 이르기까지 창세기의 아홉 장면과 구약성서의 네가지 이야기, 무녀와 예언자들, 그리고 그리스도의 조상들 등을 공간을 분할하여 묘사하고 있다. 수많은 인물들의 다양한 포즈와 표정을 뛰어난 감각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각각의 장면들에 해부학적인 코드가 들어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신의 오른손과 아담의 손이 맞닿는 장면이 묘사된 '아담의 창조'가 특히 유명하며 이 작품이 '천지 창조'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지만 이 작품의 정확한 명칭은 '천장화(The ceiling)'라고 한다.

 

길이가 40.93미터, 폭이 13.41미터, 높이가 20.7미터에 달하는 예배당의 천장에 프레스코화를 그리기 위해 비계를 설치하고 그 위에 올라가 천장을 올려다보는 자세로 4년간 잠자는 시간만을 제외하고 혼자서 작업을 한 끝에 그의 나이 37세에 이 역대의 걸작을 완성하였는데 그에게 남겨진 것은 벽에서 떨어진 물감으로 인해 거의 시력을 잃은 눈과 반쯤 불구가 된 몸이었다고 한다. 그런 사연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바라본 천장화는 내게 단순한 그림 이상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는데 그 아름다움과 거대함에 감탄을 함과 동시에 미켈란젤로의 인간적인 고통에 대한 연민 같은 것이 느껴졌다. 

 

시스티나 예배당 입구의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최후의 심판은 미켈란젤로의 또 다른 역작이다. 이 작품은 미켈란젤로가 천장화를 완성하고 25년 후인 1536년에 그리기 시작하여 1541년에 완성한 작품으로 중앙에 그리스도와 마리아를 중심으로 영생과 영원한 형벌로 갈라지는 인간 군상을 다양한 자세로 표현한 걸작이다. 1541년에 작품이 완성되었을 당시에는 성자와 성녀들이 나체로 그려져 있어서 성직자들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고 하는데, 1564년에 트렌티노 공의회에서 그림의 누드에 가리개를 씌우도록 결정되어 미켈란젤로의 제자인 볼테라에 의해서 수정되기도 했다. 개인적으로는 천장화에 비해서 최후의 심판이 회화적으로는 더 좋게 느껴졌는데 첫 프레스코화였던 천장화가 완성된지 25년이 지나 미술적으로 더욱 발전한 거장의 내공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천장화'와 '최후의 심판'으로 장식된 시스티나 예배당은 교황을 선출하는 의식인 콘클라베(Conclave)가 열리는 곳으로 내게는 댄 브라운의 '천사와 악마' 속 생생한 묘사로 인해 친숙한 곳이었다. 시스티나 예배당의 양쪽 벽면을 따라서 추기경들이 앉는 의자들이 놓여 있었는데 가이드로부터 그 의자들 중에서도 명당자리가 따로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특정 의자에 앉았던 추기경들이 이제까지 여러 차례 교황으로 선출된 사례 때문에 그렇다는데,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콘클라베를 위해 시스티나 예배당의 문이 열리면 추기경들이 앞다퉈 들어간다고 하니 왠지 근엄하기만 할 것 같은 추기경들의 서두르는 모습이 머리속에 그려지며 살포시 미소가 지어졌다.

 

시스티나 예배당에서 약 30분 정도 머물다가 밖으로 나왔다. 30분만에 그 대작을 충분히 느끼고 감상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지만 많은 사람들 사이에 서서 목을 뒤로 젖힌 자세로 오랫동안 본다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급격하게 피로감이 밀려들었다. 바티칸 박물관을 나가는 통로는 특이하게도 빙글빙글 돌아 내려가도록 되어 있었는데 그 모양이 마치 소라 같았다. 

 

 

바티칸 박물관 출구의 모습. 오전에 들어갈 때와 마찬가지로 출구 앞은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원래 바티칸 가이드 투어는 바티칸 박물관을 둘러본 다음 산 피에트로 사원(Basilica di San Pietro, 일명 성 베드로 성당)까지 둘러보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그런데 내가 방문했던 5월 2일에는 5월 1일에 있었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시복식의 일환으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관이 이날까지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었다. 그래서 수많은 카톨릭 신자들이 산 피에트로 광장을 가득 메우고 있어 도저히 산 피에트로 사원에 접근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어쩔 수 없이 그날의 일정은 그냥 마무리하고 개인적으로 다음 날 다시 산 피에트로 사원을 찾아야 했다.

 

산 피에트로 사원을 다시 찾았을 때 카톨릭의 본산답게 산 피에트로 사원에 들어가기 위해서 길게 줄이 늘어서 있었다. 

 

산 피에트로 사원은 별도의 입장료 없이 입장할 수 있었는데 안전상의 이유로 검색대에서 짐 검색을 받아야 했다. 줄이 길게 늘어섰던 이유가 바로 이 검색대 때문이었던 것인데 이런 성스러운 곳에서 조차 테러를 걱정해야 한다는 현실이 서글프게 느껴졌다.   

 

산 피에트로 사원 출입구의 모습. 

 

드디어 들어선 산 피에트로 사원. 파리에 있는 노트르담 대성당이 이 안에 쏙 들어간다고 하더니 과연 세계 제일의 성당다운 위용이었다.

 

산 피에트로 사원에 들어가자마자 바로 오른편에 자리잡고 있는 피에타(Pieta). 미켈란제로의 3대 조각상(피에타, 다비드, 모세) 중의 하나인 피에타는 미켈란젤로가 25세 때인 1499년에 만든 작품으로 그를 일약 유명 조각가로 만들어 준 작품이다. 이 작품에 얽혀 있는 재미있는 사연이 있는데 그 사연은 이렇다. 프랑스인 추기경의 주문으로 거액을 받기로 하고 제작에 돌입하였으나 작품이 완성되기 전에 추기경이 먼저 사망하는 바람에 돈을 받지 못하게 되자 홧김에 조각상을 성당 앞 광장에 버렸는데 이를 발견한 사람들이 너무나 뛰어난 솜씨에 감탄하며 이를 성당 안으로 옮겨 놓았다고 한다. 사람들이 이 조각상은 분명 사람의 솜씨가 아닌 신이 만든 것일 거라며 칭송하는 소리를 듣게 된 미켈란젤로는 자신이 만든 작품임을 알리고 싶은 마음에 정과 망치를 들고 밤에 몰래 성당으로 들어가 자신의 서명을 남겼는데 그게 바로 성모의 전대에 새겨진 '피렌치인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가 제작했음(MICHAELA[N]GELUS BONAROTUS FLORENTIN[US] FACIEBA[T])'이라는 문구라고 한다. 이 서명으로 인해 무명이었던 미켈란젤로는 하루 아침에 유명 조각가가 되었는데 나중에 자신의 치기 어린 행동을 후회하고 다시는 자신의 조각에 서명을 남기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피에타는 원래 사방에서 둘러볼 수 있도록 개방된 공간에 놓여 있었는데 1972년에 한 정신이상자가 망치로 성모의 코와 왼쪽 눈을 파손시키는 사건이 발생한 이후 현재처럼 방탄용 유리에 둘러싸이게 되었다고 한다. 손등의 핏줄 하나하나까지 정교하게 조각된 이런 걸작을 별 이상한 사람 하나 때문에 가까이에서 보지 못한다는 사실이 너무나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산 피에트로 사원의 대형 돔 아래에 자리잡은 발다키노. 발다키노는 교황이 미사를 집전하는 제대 위에 만들어진 교황의 옥좌로 초대 교황인 성 베드로의 무덤 바로 위에 위치하고 있다. 교황 우르바누스 8세의 지시에 의해 베르니니가 완성하였으며 그 높이가 29미터나 되고 무게는 37톤에 달한다고 한다. 청동으로 만들어졌는데 이를 만들 때 청동이 부족하여 판테온 내부의 천장에서 수십 톤의 청동을 떼 오기도 했다고 한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이곳에는 교황 이외에는 그 누구도 오를 수 없다고 하는데 보는 것만으로도 교황의 권위가 그대로 전해지는 느낌이었다. 

 

 

 

발다키노의 바로 위쪽에 위치한 미켈란젤로의 돔. 높이 136.5미터, 지름 42미터의 대형 돔으로 미켈란젤로가 설계하였으나 그의 사후인 1593년에 완성되었다. 판테온의 돔보다 큰 돔을 만들고자 하였으나 결국에는 실패하고 그보다 지름이 1미터 정도 작은 규모로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역설적으로 판테온이 얼마나 대단한 건축물인지를 알려 주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돔을 받치고 있는 4개의 기둥 벽면에는 4명의 성인을 조각한 대리석 조각상들. 순서대로 성녀 헬레나, 성녀 베로니카, 성 안드레아, 성 론지노. 이들 석상 안에는 예루살렘에서 성녀 헬레나가 직접 가져왔다는 예수가 매달렸던 십자가의 일부분, 성녀 베로니카가 예수의 얼굴을 닦아 준 베일의 일부분, 그리고 예수가 운명하신 후 검시관이었던 성 론지노가 예수의 옆구리를 찌를 때 사용했던 창의 일부가 보관되고 있다고 하는데 일년에 한번씩 꺼내져서 일반에 공개되기도 한다고 한다.

 

 

 

 

발다키노 뒤쪽에 위치한 예배당. 이곳은 일반에게 공개되지는 않고 있었는데 중앙에 자리잡은 성 베드로의 의자(성 베드로가 로마에서 선교 활동을 할 때 앉았던 나무 의자의 조각들을 모아 5세기경에 상아로 장식된 의자로 만들었다가 나중에 베르니니가 그 의자 위를 청동으로 입히고 장식을 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가 눈길을 끌었다.   

 

성 안드레아 상의 아래쪽에는 지하로 연결되는 통로가 있었는데 무심코 통로를 따라 지하로 내려갔다가 놀랄만한 장면을 보고 말았다. 그곳에는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작은 공간과 함께 역대 교황들과 성직자들의 석관들이 놓여 있었는데 굉장히 성스러우면서도 조금은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댄 브라운의 소설 천사와 악마에서 선종한 교황이 약물에 의한 중독사인지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산 피에트로 사원의 지하에 내려가 교황의 석관을 열고 확인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아마도 이 공간을 묘사한 것이 아니었나 싶었다. 이 공간은 들어온 길로 다시 나갈 수는 없도록 되어 있었는데 출구로 나갔더니 예기치 않게 산 피에트로 사원의 밖에 나와 있어서 조금 당황스럽기도 했다.

 

산 피에트로 사원 옆으로 난 바티칸 시국으로 들어가는 통로를 지키고 있는 스위스 근위대의 모습. 약간은 촌스러운 듯한 화려한 색상의 복장이 눈길을 사로잡았는데 이 제복이 르네상스의 대가인 미켈란젤로가 디자인한 것이라는 사실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조각, 회화, 건축에다가 의상 디자인까지... 미켈란젤로는 참으로 많은 일에 손을 대기도 했다. 

 

산 피에트로 사원 입구에서 바라본 산 피에트로 광장의 모습. 17세기에 거장 베르니니가 설계한 타원형의 광장으로 40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엄청난 규모를 자랑한다.

 

산 피에트로 광장에서 바라본 산 피에트로 사원의 모습. 

 

산 피에트로 광장의 중앙에 자리잡은 오벨리스크의 모습. 높이가 25.5미터, 무게가 350톤이나 되는 거대한 오벨리스크라고 한다. 

 

오벨리스크를 중심으로 좌우에 설치된 분수. 댄 브라운의 천사와 악마에서 살인 사건이 발생한 곳으로 상세하게 묘사되었기에 내게는 좀더 친숙하게 느껴지는 곳이었다. 

 

산 피에트로 광장과 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회랑의 모습. 회랑에는 총 284개의 원기둥이 있고 상부에는 140개의 성인상이 세워져 있다고 한다. 

 

교황의 숙소와 산탄젤로 성(일명, 성 천사 성)을 연결하는 비밀 통로의 모습. 그냥 성벽 같이 보이지만 유사시 교황이 산탄젤로 성으로 대피하기 위한 통로로 사용되는 곳이다. 댄 브라운의 소설 천사와 악마를 통해 이제는 너무나 잘 알려져서 비밀 통로라고 할 수는 없지만 소설을 너무 재밌게 읽어서 그런지 그냥 보는 것만으로도 왠지 벅찬 느낌이 들었다. 1527년에 스페인 국왕이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던 카를 5세가 교황 클레멘스 7세와 프랑스 연합군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던 '로마 약탈'에서 다른 군대가 모두 스페인군에 항복했는데도 불구하고 스위스 근위대만은 이곳 통로를 끝까지 사수하며 교황을 안전하게 산탄젤로 성으로 피신시킨 사건으로 유명하기도 하다. 이 때 187명의 스위스 근위대 가운데 147명이 전사하기도 했는데 스위스 용병들의 충성심으로 인해 이후 교황청 근위대는 전원 스위스 출신으로만 구성되는 전통이 생겨났다고 한다.

 

 

바티칸 박물관에서 내려오는 길목에 위치한 '올드 브리지(Old Bridge)' 젤라토 전문점의 모습. 로마에서 유명한 3대 젤라토 전문점(지오바니 파시, 올드 브리지, 지올리티) 중에 하나로 특히 한국인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유로 자전거 나라 가이드 말로는 자기들이 소개하여 유명해진 곳이라고 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이곳에 일하는 사람들이 짧은 한국말을 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이곳에서는 1.5유로에 푸짐한 젤라토를 맛볼 수 있었는데 친절한 남자 직원들(특히, 여자에게는 더욱더 친절함)이 마음에 들었다.

 

 

바티칸은 로마 중에서도 가장 깊은 인상을 내게 안겨 주었다. 기대했던 것 이상의 것을 나는 보고 느낄 수 있었으며 유럽 여행 중 유일하게 참가했던 가이드 투어는 정말 만족스러워서 감동을 느낄 정도였다. 이후 나는 유럽 여행 중에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바티칸 가이드 투어를 강력하게 추천하곤 했는데 내가 마치 여행사의 직원이라도 되는 것 같았다.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말이 가장 잘 적용되는 곳이 바로 바티칸 가이드 투어가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