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호주 여행

[10일차] 번지 점프를 하다 (12.26)

늘푸르른나 2010. 3. 4. 17:53

오늘은 드디어 번지 점프를 하는 날이다. 10년전에 영화 '번지 점프를 하다'를 본 이후로 항상 마음 속에 담아 왔던 그 곳에서 드디어 번지 점프를 한다는 사실에 아침부터 가슴이 울렁거렸다.

 

오전에는 본 게임에 앞서서 몸풀기로 애로우타운(Arrowtown)을 먼저 둘러 보기로 했다. 애로우타운은 퀸스타운에서 20분 거리에 있는 곳으로 1860년대에 금을 찾아 모여들었던 사람들에 의해 생성된 마을이다. 사실 내 개인적인 취향은 아닌 곳이라서 크게 기대는 하지 않았었는데 역시나 내 예상을 빗나가지 않았다. 영화속에서 봤던 서부시대의 거리 같기도 한 것이 내게 그리 큰 감흥을 주지는 못했다.

 

마을 초입에 있는 박물관에 들어가 보았다. 들어서자 마자 입구에 골드러시때 사용되었던 물건들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낡은 삽 위에 올려져 있는 실제 사금이 탐스러워 보였다. 박물관 내부의 전시실을 둘러보려 했는데 입장료를 지불해야 했다. 그냥 발길을 돌려서 박물관을 나왔다.

 

애로우타운의 중심가에서 좀 벗어난 후미진 지역으로 이동했더니 중국인 거주 지역이 있었다. 황금을 쫓아 저멀리 중국에서 뉴질랜드까지 온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이 경이롭기까지 했다. 참 무서운 중국인들이다. 하지만, 돌과 진흙을 이용해 만든 그들의 집은 너무도 초라하여 내게 연민의 정을 느끼게 했다.

 

애로우타운에서 10여분을 이동하여 카와라우 다리 번지(Kawarau Bridge Bungy)에 도착했다. 아침부터 비가 오락가락하더니 이제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내일이면 뉴질랜드를 떠나야 하기 때문에 비가 온다고 해서 번지 점프를 다음으로 미룰 수도 없었다. 하늘이 원망스럽기만 했다. 지금까지 뉴질랜드 남섬에 머무는 4일 중에 3일이나 비가 내리다니 이건 거의 저주 수준이 아닌가? 빗줄기가 굵어지지 않기만을 바라면서 번지 점프 샾으로 들어섰다. 

 

나선형으로 나 있는 길을 따라 내려가니 기념품 샾과 카운터가 눈에 들어왔다. 카운터 앞에는 번지 점프를 위해 몸무게를 재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벌써부터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실제로 번지 점프를 하기 전에 우선 간을 보기로 했다. 다른 사람들이 하는 걸 좀 보고 마음의 준비를 하려는 생각에서 였다. 번지 점프 샾을 나가니 그토록 꿈에 그렸던 카와라우 다리가 눈 앞에 나타났다. 와우...

 

카와라우 다리 번지는 AJ Hackett이 만든 세계 최초의 상업용 번지 점프대로 높이가 43m에 이른다. 그야말로 번지 점프의 원조라 할만하다. 우리나라에는 영화 '번지 점프를 하다'의 마지막 장면에서 이병헌을 포함한 2명의 남자 주인공이 함께 뛰어 내린 곳으로 유명하기도 하다. 굽이치는 협곡, 그 협곡을 흘러가는 하늘색의 강물, 협곡에 걸쳐 있는 다리가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어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웠다. 

 

관람대에는 많은 사람들이 서서 번지 점프를 지켜보고 있었다. 가족이나 친구가 뛰어 내릴 때마다 환호성을 지르면서 즐거워 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그저 관광의 목적으로 와서 지켜 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 사이에 자리를 잡고 어떤 식으로 번지 점프를 하는지 관찰했다. 기왕 뛰는 거 멋있게 뛰어 내리고 싶어서 특히 자세에 집중하여 연구했다.

 

마음의 준비를 마치고 카운터에 가서 번지 점프 비용으로 NZD $175(약 15만원)를 지불했다. 좀 비싼 감이 없지 않았으나 10년을 기다렸던 나에게 돈은 문제가 아니었다. 비용을 지불하면 바로 뛸 수 있는 건줄 알았는데 영수증을 주며 1시간 후인 3시에 체크인하러 다시 오라고 했다. 줄서서 기다릴 정도로 워낙 하려는 사람이 많아서 그런지 시간별로 인원수를 제약하는 듯 했다. 바로 뛸 생각에 마음 단단히 먹고 있었는데 맥이 풀렸다.

 

주의사항을 보니 번지 점프를 할 때 주머니에 아무런 소지품도 있어서는 안된다고 되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거꾸로 메달리게 되는데 주머니에 물건이 남아날 수가 없겠다. 다른 사람들은 일행이 있으니 맡아줄 사람이 있지만 나는 마땅히 맡길 데가 없었다. 다른 소지품은 다 차에 두고 온다 쳐도 차 키는 어떻게 한단 말인가? 궁리 끝에 소지품 뿐만 아니라 차 키도 차에 넣어 두고 문을 잠그지 않는 방법을 사용했다. 나로서는 궁여지책이었다.

 

드디어 3시가 되어 체크인을 위해 카운터 앞에 갔다. 카운터 앞에 놓여 있는 체중계에 올라서게 하여 내 몸무게를 재더니 내 손등에 큼지막하게 몸무게를 적어 주었다. 이건 몸무게에 따라 줄의 길이를 조절하기 위한 것 같았다. 문서 하나를 주면서 확인하고 서명하라고 했다. 고혈압, 심장병 등의 지병이 있으면 번지 점프를 할 수 없다는 주의사항과 혹시 있을지 모르는 사고의 위험을 감수하겠다는 내용이 들어 있는 문서였다. 그리고 번지 점프를 포기했을 때 환불이 안된다는 설명이 곁들여 졌다. 서명을 하는데 수술 동의서에 서명하는 것과 같은 기분이 들었다.

 

카운터 옆에 나 있는 계단을 통해 번지 점프대로 향했다. 다리에는 2개의 번지 점프대가 있었는데 몸무게에 따라서 번지 점프대가 지정되었다. 왼쪽은 몸무게가 가벼운 사람들(주로 여자들)이 오른쪽은 몸무게가 일정 수준 이상인 사람들이 지정되는 거 같았는데 나는 오른쪽에 있는 번지 점프대를 지정받았다. 지급받은 와이어 액션용 벨트(허리와 양쪽 허벅지에 걸치게 되어 있는 벨트)를 착용하고 번지 점프대 뒤에 줄을 섰다. 내 앞에는 2명의 사람이 대기 중이었다.

 

앞 사람들이 뛰는 것을 보니 다들 거침없이 잘도 뛰었다. 괜히 한번에 뛰어 내리지 못하고 머뭇거리면 참 없어 보일 것만 같았다. 더군다나 난 대한민국의 예비역이 아닌가? 내 차례가 되어 다리에 압박대가 감기고 로프가 연결되었다. 그리고 와이어 액션용 벨트에도 추가적으로 보조 로프가 연결되었다. 혹시 다리에 연결된 로프가 끊어질 경우를 대비한 것 같은데 한결 안심이 되었다.

 

두 다리가 묶였기 때문에 강시 걸음으로 번지 점프대의 끝으로 이동했다. 진행 요원이 내게 계속 뭐라고 하는데 난 그걸 긴장하지 말라는 소리로 알아 듣고 '오케이'만을 반복했다. 근데 그 친구가 내 발끝을 가리키며 발끝이 번지 점프대 끝보다 더 앞으로 나가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뻘쭘했다. 난 나름대로 애써 태연한 척 하려 했었는데 긴장한 티 다 내버렸다. 번지 점프대 끝에 섰는데 차마 아래를 내려다 볼 수 없었다. 아래를 내려다 보면 겁먹어서 뛰어 내리지 못할 것만 같았다. 카운트가 시작됐다. three, two, one, Bungy! 에라 모르겠다. 'Bungy' 소리에 맞춰 냅다 뛰어 내렸다. 

 

맞바람이 확 몰려왔다. '순간적으로 내가 참 무거워서 정말 빠른 속도로 떨어지고 있구나'하는 느낌이 들었다.

차마 강물은 쳐다보지 못했다. 2초도 안되는 짧은 시간이 흐른 뒤 몸이 튕겨져 올랐다. 내 몸이 내 맘대로 컨트롤되지 않았다. 나름 자세를 잡아 보려고 몸에 힘을 주었으나 내 의지와는 관계없이 몸이 움직여 더 힘들었다. 몸에 힘을 빼고 그냥 움직임에 순응하기로 했다. 3번 정도 튕겨 오르고 나서 거꾸로 매달린 채로 있으니 그제야 정신이 돌아와서 강물이 시야에 들어왔다. 고무보트가 내 아래쪽으로 이동하여 흰 장대를 내게 내밀었다. 한번만에 장대를 잡았다. 고무보트 위의 진행 요원이 나를 끌어 내렸다. 드디어 배에 안착했다. 진행 요원들이 잘했다고 칭찬해 줬다.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내가 해냈다는 생각에 뿌듯함이 밀려왔다. 진행 요원들이 카메라를 가리켰다. 급방긋 웃으면서 V질을 했다. 

 

강기슭을 따라 나 있는 계단길을 통해 다리로 돌아왔다. 차에 가서 소지품을 다시 챙겨 가지고 번지 점프 샾으로 갔다. 번지 점프를 성공한 사람들에게 주는 인증서와 기념티를 받기 위해서 였다.

 

인증서와 기념티를 주면서 내가 점프하는 장면을 촬영한 사진과 동영상을 보여 주었다. 동영상을 보니 내가 생각했던 자세와는 딴판이었다. 그렇게 남들이 하는 것을 열심히 연구했건만 역시 이론과 실제는 다른거 같다. 다이빙하는 자세로 뛰어 내리고 싶었는데 너무나 아쉬웠다. 내 일생에 딱 한번만 하려고 했던 건데 아무래도 다음에 멋진 자세로 다시 한번 해야 겠다. 사진 9장과 동영상 합쳐서 NZD $80(약 7만원)에 구매할 수 있었다. 좀 비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안 살 수 없었다. 

 

오랫동안 기다려 왔던 거에 비해서 너무 빨리 끝나 버렸기 때문인지 발길이 잘 안 떨어졌다. 비를 피해 다리 밑의 공간에 자리를 잡고 여유있게 다른 사람들의 번지 점프를 감상했다. 신기하게도 다리 밑의 공간에는 번지 점프 상황을 실황 중계해주는 모니터도 설치되어 있었다. 참 여러모로 잘 만들어 놨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산 KFC 치킨 세트로 저녁을 해결하고 짐정리를 한 다음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내일은  시드니로 떠나기 전에 스카이라인 전망대에 올라 퀸스타운 전경을 마지막으로 둘러 볼 예정이었다. 내일만은 푸른 하늘을 볼 수 있기를 소원하며 잠을 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