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호주 여행

[3일차] 유황의 도시 로토루아에 여장을 풀다 (12.19)

늘푸르른나 2010. 2. 8. 18:52

너무 피곤해서 였을까? 아니면 시차 때문이었을까? 간밤에 잠을 깊게 자지 못해 몸이 개운치 못하다. 호텔방을 나서기 전에 공항 수화물 서비스 데스크에 전화를 걸었다. 분실 신고시 등록된 번호를 불러 주고 내 가방의 상태를 물어 보니 오늘중으로 시드니에서 오클랜드로 배송될 예정이라고 한다. 혹시나 분실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불안감이 있었는 데, 그나마 불행중 다행이다. 오늘 중으로 내 가방을 받을 수 있겠지 하는 기대감에 한결 기분이 좋아 진다.

 

어젯밤 2시간에 NZD $10 짜리 인터넷을 사용했기 때문에 호텔 체크아웃을 하면서 추가 비용 정산을 하려고 잔뜩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왠일인가? 공항으로 전화하면서 사용한 시내통화에 대한 요금(약 NZD $1)만을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약간의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도 '이게 왠 횡재냐'하는 생각에 이실직고하지 않고 얼른 체크아웃하고 호텔을 나왔다. 사실 그렇게 비싼 비용을 지불하고 인터넷을 사용하는 것이 굉장히 낯설었던 관계로 크게 미안한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아점(아침 겸 점심)으로 버거킹 햄버거를 먹고 본격적인 뉴질랜드 북섬 여행길에 올랐다. 오클랜드 시내로부터 약 3시간 정도를 남쪽으로 달려서 와이토모 동굴(Waitomo Caves)에 도착했다. 인터넷에서 찾아 본 여행 안내 정보에 세계 8대 불가사의라고 되어 있었기 때문에 큰 기대를 잔뜩 안고 관광 안내소에 들어 섰다. 와이토모 동굴은 세부적으로 Ruakuri, Aranui, Glowworm의 3개의 석회 동굴로 이루어 진 지역이다(영문 표기시 Waitomo Caves라고 굳이 복수형이 사용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나라의 환선굴처럼 입장권 구입 즉시 바로 입장할 수 있는 방식이 아니라 동굴별로 입장 시간이 정해져 있고 가이드가 함께 다니면서 이것 저것 설명해 주는 방식이기 때문에 한번에 입장할 수 있는 인원이 제한되어 있다. 3개의 동굴중 Ruakuri(2시간 소요)와 Glowworm(45분 소요) 동굴을 함께 구경할 수 있는 Combo 입장권이 가장 인기가 있다고 하는 데, 난 14:00 정도에 도착했음에도 불구하고 Ruakuri 동굴에 입장할 수 있는 마지막 시간인 15:30까지의 예약이 인원초과로 모두 마감되어 아쉽게도 Ruakuri 동굴을 둘러 볼 수 없었다. 꿩 대신 닭으로 Aranui(45분 소요)와 Glowworm 동굴을 함께 구경할 수 있는 Combo 입장권을 NZD $65에 구입하고 15:00에 입장이 허용되는 Aranui 동굴 입구로 이동했다.

 

Aranui 동굴 입구에 도착하니 사람도 없고 여기서 기다리라는 안내 표지판 만이 덩그러니 세워져 있다. 시간을 보니 14시 20분, 관광이 시작되는 15시까지는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아 있다. 어디 앉아 있을 만한 곳도 없고 하여 어떻게 시간을 보내야 하나 고민하면서 주변을 배회하던 중, 30분 정도 거리의 산속 산책로를 발견하고 산책로에 발길을 들였다. 

 

산책로를 따라서 걷다 보니 이국적인 숲의 모습들이 눈에 들어 오는 것이 신선하다. 곳곳에 동굴도 있고 계곡물도 흐르는 것이 나름 운치도 있다. 산길임에도 험하지 않고 우거진 나무들에 의해서 햇빛이 가려져서 채 30분이 걸리지 않아서 가뿐하게 산책을 마칠 수 있었다. 

 

산책로 탐방을 마치고 동굴 입구로 돌아 오니 10여명 남짓한 관광객들이 가이드를 기다리고 있다. 다들 가족 단위로 온 관광객들뿐인데 나만 혼자라 약간 뻘쭘하다. 애써 태연한 척 하며 가이드가 오기만을 기다린다. 드디어 가이드가 나타나고 Aranui 동굴 관광이 시작되었다. 가이드가 동굴 입구의 철문에 채워져 있는 자물쇠를 풀고 문을 열었다. 동굴 안으로 들어 선 순간, 경이로움 보다는 실망감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내 입을 떡 벌어지게 만들 그 무엇인가를 애타게 찾아서 동굴 내부를 다 둘러 보았으나 결국에는 찾지 못했다. 기대를 너무 해서 실망이 더 컸던 걸까? Aranui 동굴에 비하면 우리나라의 환선굴은 정말로 판타스틱하고 원더풀하면서도 스펙터클하다.    

 

45분간을 짧은 Aranui 동굴 관광을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모든 관광객들이 밖으로 나오 길 가다렸다가 가이드가 다시 철문의 자물쇠를 채운다. 매번 관광할 때만 철문을 열었다가 다시 닫아 두는 것이 참 이채롭게 느껴진다. '2시간이 소요되는 Ruakuri 동굴은 좀 볼만할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해본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 남아 있는 Glowworm 동굴에 기대를 품고 자리를 옮겼다.

 

Glowworm 동굴에 들어 섰다. Glowworm은 반딧불이 종류의 곤충인데 소음이나 빛에 민감하여 최대한 조용히 해야 하고 사진 촬영이 금지된다. 어두운 벽면을 따라서 다닥다닥 붙어 있는 Glowworm에서 발산되는 빛을 동굴에 흐르는 물 위를 배를 타고 이동하면서 관람하도록 되어 있는 데, 생각만큼 화려하지는 않다. 밤하늘의 은하수를 보는 것 같을 줄 알았는 데, 역시나 기대가 너무 컸었나 보다. 쓸만한 사진도 거의 찍지 못하고 전체적으로 와이토모 동굴 여행은 내게 큰 감흥을 주지 못한 채 아쉬움만을 남겼다.

 

와이토모 동굴로부터 앞으로 3박 4일간 베이스 캠프가 될 로토루아의 호텔로 이동하기 위해 30번 도로를 타고 동쪽 방향으로 차를 몰았다. 로토루아에 도착할 때까지 2시간여 동안 드넓게 펼쳐진 목초지와 낮은 구릉만이 계속 눈 앞에 나타날 뿐 높은 산도, 논이나 밭과 같은 농경지도 눈에 보이지 않는다. 이런 걸 목가적인 풍경이라고 해야 할까? 우리나라에서 볼 수 없는 풍경이긴 한 데 가도 가도 계속 같은 풍경이니 좀 지루해 진다.

 

저녁 7시가 넘어서 로토루아의 IBIS 호텔에 도착했다. 5층 짜리 건물인데 로토루아 호수랑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는 것이 너무 마음에 든다. 이번 여행길에 예약한 호텔들 중에서 유일하게 아침 식사가 무료로 제공된다는 점도 마음에 드는 것 중에 하나다. 

 

2층의 방을 배정받았다. 저층이라서 전망 같은 것은 기대하지 않고 방에 들어 섰다. 그런데 이게 왠 대박인가. 호텔 창을 통해서 로토루아 호수의 전경이 보이는 것이 아닌가. 얼른 카메라를 꺼내 사진을 찍었다. 캬, 이건  창이 아니라 마치 벽에 걸려 있는 액자 같다. 

 

로토루아 호수의 경치에 빠져 정신줄을 잠시 놓고 있다가 공항에서 헤매고 있을 내 가방의 행방이 궁금해 졌다. 인터넷에 접속하여 분실 신고된 내 가방의 위치를 확인해 봤다. 오늘 오후에 시드니발 오클랜드행 Qantas 항공편으로 오클랜드 공항까지는 도착했는 데, 내가 로토루아로 이동하는 바람에 내일 오전에 출발하는 오클랜드발 로토루아행 국내선 항공편에 의해 배송될 예정인 것으로 되어 있다. 헐, 오늘 중으로 가방 받기는 또 글렀다. 같은 속옷을 3일째 입고 있는 데 찜찜해 미치겠다.

 

저녁을 먹기 위해 호텔을 나섰다. 오늘은 왠지 매콤한 음식이 먹고 싶다. 호텔 가까운 곳에 음식점들이 모여 있는 거리를 배회하다 'The Thai'라는 이름의 태국 음식점이 눈에 들어 왔다. 파타이나 먹을까 하고 태국 음식점에 들어 갔다. 내부 인테리어가 태국 음식점 답지 않게 깔끔하고 널찍한 것이 마음에 든다. 주문한 파타이가 나왔다. 맛을 보니 미국과 우리나라에서 먹어 보았던 파타이와 다르지 않은 것이 입에 맞는다. 역시 파타이를 주문하기 잘했다는 생각에 흡족해 하며 간만에 배부르게 저녁을 먹었다.

 

저녁을 먹고 나서 소화도 시킬 겸 로토루아 호수 주변을 산책했다. 토요일 저녁이어서 그런지 가족 단위로 바람 쐬러 나온 사람들이 많이 눈에 띈다. 호수 주변의 공터에는 트럭 등을 개조하여 만든 이동식 놀이 기구 및 스낵바 등이 늘어서 있어 마치 유원지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호숫가의 벤치에 앉아 캔맥주 하잔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주변에 캔맥주를 살 만한 곳이 보이지 않는다. 로토루아를 떠나기 전에 반드시 나름 분위기를 내보리라 마음 먹고 호텔로 발걸음을 돌렸다.